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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람: 최저의 퍼포먼스

글 박혜진

입구를 가리고 있는 커튼을 걷어 다소 어두운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 편에 자리한 커다란 원형 좌대 위에 누워있는 사람에게 먼저 눈이 간다. 좌대 옆 벽면에는 사진촬영 금지 표시와 함께 “더 이상 죽은 사람의 사진을 찍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검은색 스프레이로 새겨져 있다. 이윽고 번쩍, 찰칵. 좌대 뒤쪽에 서 있는 삼각대 위 카메라가 플래시를 터뜨리며 무언가를 촬영한다. 꽤 무방비 상태로 입장했을 관람객은 본인 쪽을 향한 카메라 렌즈와 플래시에 약간 놀란다. 사진을 찍지 말라는 벽면의 이미지가 무색하게 강렬하게 터지는 플래시. 무엇이 찍힌 것이지? 관람객은 찍힌 장면이 투사되고 있는 카메라 옆 벽면의 영상을 유심히 살펴본다, 본인이 찍혔는지, 안 찍혔는지.

이 순간부터 관람객은 전시를 관람하는 내내 카메라를 의식하게 된다. 카메라에 자신의 모습이 찍히는 것이 불편한 관람객은 관람 동선에 영향을 받을 것이며, 크게 개의치 않는 사람이라도 관람 중 계속해서 터지는 플래시에 반응하게 된다. 물론, 자신의 모습이 촬영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본인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마음껏 활용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카메라의 화각 안에 좌대 위에 누워있는 사람은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카메라의 시선에서 자유롭다. 그저 누워 있을 뿐, 눈에 띌만한 동작은 하지 않는다.

정아람의 개인전 《최저의 퍼포먼스》는 퍼포먼스에 대한 작가의 탐구와 관점을 풀어낸 두 가지 프로젝트를 보여준다. 작가에게 출발점이 된 작업이 위에서 묘사한 <더 이상 죽은 사람의 사진을 찍지 마세요>(2011/2020)로, 2011년 작가가 미국 뉴욕에서 전시한 작업을 재구성해 이번에 한국에서 처음 선보인다. 이 작업이 시각예술 안에 자리한 퍼포먼스라는 장르에 대한 작가의 실험을 보여준다면, 다른 프로젝트는 전시 제목과 동명인 영상작업과 인터뷰로, 퍼포먼스를 조금 더 확장된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분석한다.

<더 이상 죽은 사람의 사진을 찍지 마세요>

<더 이상 죽은 사람의 사진을 찍지 마세요>는 시각예술에서 퍼포먼스라고 부르는 장르의 구성요건을 전반적으로 충족시킨다. 퍼포머(의 몸)가 존재하고, 관객이 오가며, 이를 기록하는 장치(카메라) 또한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세 요소는 전시 기간이라는 특정한 시간 동안 탈영역우정국이라는 특정 공간에서 조우하며 퍼포먼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그 구성요소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각 요소가 우리가 통상 기대하는 역할을 명확하게 수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서로의 역할을 넘나들며 요소 간의 관계를 교란시키고 있는 것이다.

퍼포머의 퍼포먼스

퍼포머가 관객에게 특정 공연 혹은 경험을 선사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일반적인 퍼포먼스에는 존재한다. <더 이상 죽은 사람의 사진을 찍지 마세요>에서는 퍼포머가 좌대 위에 위치함으로써 ‘작품’의 역할을 부여받기에 그러한 기대감이 한층 높아진다. 물론 퍼포먼스의 양상은 이 장르가 시각예술에 편입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다양하게 변화하였다. 1970년대에 성행했던 바디 아트(Body Art)로 대표되는 퍼포먼스는 주로 작가가 퍼포머가 되어 조각과 회화로부터의 탈출을 실험하는 과정을 보여주었고, 1980년대부터는 다양한 테크놀로지와의 결합으로 퍼포먼스 장르가 확장하는 모습을, 그리고 타 장르와 협업하며 다원예술의 주요 축이 되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그런가 하면, 협업으로 점차 강화된 ‘기교적 완성도’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상적인 행위를 보여주기도 하였고, 전문 무용수나 공연자가 아닌 일반인이 퍼포머로 참여하기도 했다. 정아람의 작업 또한 이러한 ‘일상 행위로서의 퍼포먼스’ 맥락 속에 있는데, 본 작업에서 퍼포머는 한 발 더 나아가 가만히 누워서 아무 행위도 하지 않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작가의 기획에 따라 휴지상태에 있는(혹은 휴지상태를 연기하는) 퍼포머는 관람객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않는 것은 물론,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자세 중 가장 연약하고(vulnerable) 사적인 상태로 불특정 다수인 관객을 맞이한다. 누운 퍼포머는 서 있는 관람객의 눈높이보다 훨씬 아래에 있을 뿐 아니라, 관객의 시선/응시 아래 놓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 형성되는 권력관계가 강조된다. 관람객은 주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퍼포머를 바라보거나 오래 바라보지 않고 다른 설치물에 시선을 돌린다. 퍼포머가 아무 행위도 하지 않기 때문에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도 있겠지만, 묘하게 불편한 마음이 들어 피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관객의 주의를 계속 붙잡아 두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해제된 퍼포머와, 그러한 퍼포머에게 오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또는 그러지 못하는 관객의 관계는 퍼포먼스를 관람하는 일반적인 태도를 벗어난다. 또한, 퍼포머가 마냥 관객의 시선에 노출된 채 대상화되는 것만은 아니다. 좌대가 관객의 공간과 퍼포머의 공간을 분리하는 장치가 되고, 원한다면 퍼포머 또한 관객을 얼마든지 응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에 있다. 단순히 관객과 퍼포머의 역할이 뒤바뀐 것이 아니라, 퍼포머는 퍼포머이기도 하면서 관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관객의 퍼포먼스

관객 또한 관객으로서의 입장을 유지하기도 하면서 퍼포머가 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커다란 원형 좌대 위에 있는 퍼포머의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지만, 아무 행위도 하지 않는 퍼포머는 오히려 관람객 같고 전시 공간 내에서 오히려 활동이 더 많은 관객이 오히려 퍼포머가 된 듯하다. 특히 지속적으로 전시공간을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 때문에 관객은 무대가 된 전시 공간에 있는 내내 퍼포먼스하는 느낌으로 있거나 카메라의 시선과 더불어 퍼포머의 시선 또한 느끼며 본의 아니게 연기 아닌 연기를 하게 되기도 한다(퍼포머를 등지고 영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수시로 촬영하는 카메라와 퍼포머의 관찰 대상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 전시공간을 무대 삼아 주인공이 되어 본인의 모습을 벽면에 노출시키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카메라와 퍼포머의 시선에 스스로 대상화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카메라의 퍼포먼스

한편, 주로 퍼포머의 공연을 기록하는 역할을 하는 카메라는 오히려 퍼포머를 제외한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카메라는 퍼포머의 심장박동에 의해 셔터가 눌린다. 작업을 총괄하는 작가가 원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것도 아니고, 엄밀히 말하자면 퍼포머의 의지도 아니다. 일정한 리듬은 있지만 임의성이 존재하기에 포착되는 장면은 그 누구의 통제 하에 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다소 엉뚱하거나 쓸데없는 장면을 반복해서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는 그 기본 성능(퍼포먼스)인 기록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않다. 하루 약 3,000장, 전시 전체 기간 동안 약 50,000장의 사진이 찍힌다고 하는데, 그 속에는 퍼포먼스의 결과도 담겨있지 않고, 촬영된 장면이 작품의 일부로 남지도 않는다. 그 대신 카메라는 전시공간 안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현재진행형의 촬영(플래시의 터짐, 심장박동에 의한 촬영, 카메라의 존재로 인해 영향받게 되는 관객 등)을 통해 전시 공간에서 관객과 퍼포머의 역할을 교란시키는 또 하나의 퍼포머가 된다.

결국 <더 이상 죽은 사람의 사진을 찍지 마세요>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본래 주어진 역할을 하지 않고 서로의 역할을 넘나들며 고정되지 않은 채 복수의 퍼포먼스를 수행한다. 주목할 점은 관객의 동선에 따라 각 역할이 유동적으로 그리고 수시로 변화한다는 점이다. 정아람은 전시장을 퍼포먼스 실험의 장으로 구축하여 그 구성과 구조를 분석하며, 퍼포먼스만의 현장성을 극대화한다.

<최저의 퍼포먼스 I>

<더 이상 죽은 사람의 사진을 찍지 마세요>가 현대미술 내에서의 퍼포먼스에 대한 고찰을 담은 작업이라면, <최저의 퍼포먼스 I>(2020)은 퍼포먼스가 아우르는 의미를 사회문화적으로 확장하여 작업으로 전환한다. 앞서 본 <더 이상 죽은 사람의 사진을 찍지 마세요>의 퍼포머와 유사하게 누워 있거나 앉아 있으면서 특별한 행위를 하지 않는 퍼포머가 화면을 가득 채운 회색 바닥면 한가운데에 등장한다. <최저의 퍼포먼스 I>에서는 작가의 요청에 따라 다섯 명의 문화예술계 노동자들이 각자 쉴 때, 혹은 소진의 경험 후 중단의 상태일 때 취하는 가장 편한 자세를 보여준다. 한 자세를 약 1분간 취하다가 필요에 따라 살짝 자세를 바꾸는데, 카메라는 이 과정을 조감도를 보여주듯이 퍼포머의 머리 위에서 촬영한다. 이내 다른 인물이 화면에 들어와 퍼포머의 주위를 돌며 흰색 스프레이 래커로 퍼포머가 취한 포즈의 외곽선을 따라 래커 선을 뿌리며 마킹한다. 한 명이 마킹하는 과정을 끝내면 다른 인물이 등장해 다시 마킹을 하고, 이 과정은 몇 차례 반복된다. 이때 카메라는 래커 뿌리는 퍼포머를 따라, 혹은 반대로 돌며 전체 세트를 한 번에 보여주지 않고 이동하는 시점에 따라 현장의 일부를 언뜻언뜻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퍼포머의 주변에 다른 인물들이 서 있으면서 래커로 기록할 순서를 기다리며 지켜보는 상황이 드러난다. 거리의 차이는 있지만 카메라의 시점, 즉 관람객의 시점과 주변에 서서 응시하는 다른 참여자들의 시점이 겹치면서 관람객은 참여자의 일부로 흡수된다. 서로 돌아가며 포즈를 취하고, 서로를 마킹해주며 관람자의 역할을 하기도, 수행자/주인공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 참여자들이 관람객과 함께 퍼포먼스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휴식의 시간은 실은 굉장히 사적인 시간이다. 특히 멈추지 않고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성과를 만들어내야만 생존할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 소진의 경험 이후 뒤따르는 중단과 멈춤, 쉼의 시간은 들추거나 남과 공유하고 싶지 않은 순간일 것이다. <최저의 퍼포먼스I>에서는 이러한 개인적인 상황을 관람객을 포함한 참여자들이 함께 의식화하고 기록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공유한다. 작가는 현대사회가 추구하는 ‘최고의 퍼포먼스’가 아닌, 정반대의 ‘최저의 퍼포먼스’를 동료들과 함께 만들면서 이용 가치, 효용성, 발달, 가시성 획득으로 대변되는 퍼포먼스의 반대급부로서 오히려 멈춤, 비효율, 비가시화 등을 상징하는 행위를 조명하고 그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것이다.

<최저의 퍼포먼스: 인터뷰>

<최저의 퍼포먼스 I>를 관람하는 동안 우측 공간에서는 높낮이가 없는 다소 무미건조한 말투의 여성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는 <최저의 퍼포먼스I> 영상에 등장하는 다섯 인물들의 인터뷰 <최저의 퍼포먼스: 인터뷰 >(2020)가 상영되는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이다. <최저의 퍼포먼스I>이 개인의 소진 경험을 공동의 퍼포먼스로 전환함으로써 이미지화하여 표현했다면 인터뷰는 더욱 직접적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으로 관객과 소통한다. 모니터 뒤쪽에도 모니터 한 대가 더 있는데, 두 대가 서로 등을 맞대고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한 쪽 모니터를 보는 동안 반대편 모니터는 볼 수 없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면 등장인물의 입모양과 음성에 약간의 시간차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입모양으로 봐서는 분명히 들리는 소리와 동일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싱크가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화자가 다른 인물로 바뀌어도 목소리는 그에 맞춰 매번 바뀌지 않는다. 이때 관람객은 인터뷰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과, 이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목소리의 주인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아람은 인터뷰이 본인의 목소리를 그대로 관객에게 전하지 않고 제3자의 음성을 개입시키는 장치를 두었다. 작가는 중학생에게 인터뷰 내용을 들으면서 그대로 따라 말하도록 요청하였고, 반대편 모니터에서는 헤드폰을 쓴 여중생이 모니터를 보며 흘러나오는 인터뷰 화자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뒷모습을 볼 수 있다. 중학생은 들리는 말을 단순히 옮길 뿐, 그 내용에 공감하거나 이입하지는 못한다. 그렇게 개인의 목소리가 삭제된 채 건조한 말투로 전달되는 인터뷰이들의 이야기는 감정 이입으로 인해 발화내용이 특정 개인의 감성적인 경험담으로 함몰될 수 있는 위험을 줄인다. 그뿐만 아니라, 등장인물과 발화자를 분리한 이중 구조를 반대편 모니터에서 보여줌으로써 인터뷰 자체도 하나의 퍼포먼스로 만드는 역할 또한 한다.

등장인물들이 전하는 이야기들은 본인이 겪은 소진과 소모의 경험, 더 이상 퍼포먼스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 그런 상황 이후의 삶, 그리고 지속 가능한 퍼포먼스 등 작가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들이다. 어떤 이는 퍼포먼스를 작업의 일부로서만 제한하는가 하면, 다른 이는 본인이 수행하는 모든 행위를 퍼포먼스라고 보는 등 개인마다 생각하는 퍼포먼스의 범위가 다르다. 그럼에도 모두 퍼포먼스의 효용성 혹은 성과에 대해 의식하며 강박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퍼포먼스가 시각예술계에서 말하는 의미이든 일상 속에서 보여주는 일종의 능력치이든, 모두 최대한의 성과와 최고의 효율성을 보여주어야 ‘살아남는다’라는 공식에 수긍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인터뷰를 본 후에 다시 <최저의 퍼포먼스 I> 영상을 보노라면 이들이 자신의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단순히 예술로서의 퍼포먼스가 아닌 삶에서, 혹은 내가 속해있는 사회문화적 구조 내에서의 정지 상태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더 와닿게 된다.

정아람은 이미 2011년에 시각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아 제도화되고 역사화되고 있는 퍼포먼스의 요소요소를 뜯어보는 작업을 진행했다. 2020년에 다시 이 소재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현재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과로서의 퍼포먼스’를 강요받는 개인의 상황과 작가가 다루었던 <더 이상 죽은 사람의 사진을 찍지 마세요> 퍼포먼스 작업에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생존경쟁으로 쌓인 개인의 피로도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퍼포먼스로 전환되는 상황은 <더 이상 죽은 사람의 사진을 찍지 마세요>와 <최저의 퍼포먼스>의 연결고리가 된다. 두 프로젝트 모두 목적이 있는 퍼포먼스, 보여주고자 하는 퍼포먼스와 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실험성이 동반된, 비판과 성찰의 장르였던 퍼포먼스가 덩치만 커지거나 자본화되고, 퍼포먼스를 위한 퍼포먼스가 되는 상황에 대한 비판이 엿보이기도 하고, 그와 동시에 효율성, 생산성, 성과를 중시하는 현대사회 전반에 반대하는 방법으로 최저(low, least, minimum)의 퍼포먼스를 제시하려는 시도 또한 보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죽은 사람의 사진을 찍지 마세요>에서 아무 행위도 하지 않는 퍼포머의 몸은 제목에서 암시하는 ‘죽은 몸(dead body)’으로 보이지만, 실은 심장박동으로 카메라 셔터를 작동시키기에 역설적으로 살아있음을 나타낸다. 죽은 사람의 사진을 찍지 말라지만, 죽어 보이는 사람은 자신의 살아있는 몸의 리듬으로 사진을 찍고 있으니 재미있는 아이러니이다. 전시 전반의 주제와 묶어 생각해 본다면 효율적인 퍼포먼스를 하지 않는 몸을 죽은 몸으로 치부하는 현대사회에서 효율적인지 않은 몸의 퍼포먼스도 살아있을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게 아닐까. 마찬가지로 <최저의 퍼포먼스I>에서 래커 작업이 끝난 후 퍼포머의 신체가 빠진 외곽선만을 보여주는 장면은 마치 사건 현장의 기록을 위해 남겨진 초크 아웃라인 같기도 하지만, 실은 이 장소에서 살아있는 이의 ‘최저의’ 행위가 분명히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흔적이 되기도 한다. 정아람은 이렇게 최소한의 행위로 어떤 퍼포먼스가 가능한지 실험함으로써 우리에게 과연 최고의 퍼포먼스만이 진정한 ‘살 길’인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출처: 정아람 개인전 <최저의 퍼포먼스>(2020) 전시 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