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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창작센터 2016 어드바이징 프로그램]
정아람, 집단성을 관통하는 개별성의 전략
김정현 미술비평가
이미지는 산 것인가, 죽은 것인가? 무생물 재료를 버리고 생명체를 직접 재료로 삼는 바이오아트는 이미지의 생명에 관한 가장 일차원적인 답변을 제시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생명공학 실험실의 문을 열고 나온 지척에서 퍼포먼스 미술이 거론된다. 이미지에 관해 조금 더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관점을 제공하는 시각문화연구 일각에서는 우상숭배나 우상파괴의 대상이 되는 이미지의 생명에 주목한다. 감상자를 지배할 만큼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 이미지는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는 동시에 수용자의 생명 신호에 반응하는 것이다. 이미지의 생명 지향성 또는 창작자와 관람자의 사회적 편향성은 시각예술의 과제를 예술과 사회에 관한 논쟁 속에 정립하도록 해왔다. 대개의 사회적 예술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현상을 코드로 사용하는 정아람의 퍼포먼스 작업도 두 가지 맥락에서 생기론적으로 접근해볼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사회적 삶이나 수용자의 생명과 자동 연동되는 이미지의 생명에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죽음의 이미지 또는 이미지의 죽음을 환기시키려는 듯하다.
사진 또는 카메라를 이용한 초기 작업 'CPR Camera'(2009)와 'Taking 100 Beats Per One Minute'(2009)에서 이미지를 생산하는 주체의 의식이나 인격은 생체 신호로 환원된다. 작가는 카메라와 심폐소생술의 유사한 작동 원리 또는 사진 이미지와 심폐소생술의 리듬을 대비하여, 인간주의적인 생명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대신 기계적 이미지의 생명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이 중 후자의 작업에서는 연속 촬영한 이미지의 변칙적인 배열을 이용하여 기계 복제 이미지의 생명 없음을 보충하는 개입을 고민한 듯하다. 이렇게 심폐소생술이라는 소재는 기록이나 재현의 대상이 되어 작업의 내용을 구성하는 대신, 사진이라는 이미지의 기계적 성격에 대한 비평적 관점을 드러내는 데 사용된다.
2014년을 기점으로 정아람은 기계 장치와 생체 신호를 교차시키는 추상적이고 환원적인 작업을 넘어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한국 사회의 특정한 현상들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작가의 작업에서 사회적 코드가 작동하는 방식을 고려하면 비교적 최근작인 '행복하십니까'(2014)와 '우연히 살아남은 내가, 당연히 살아남았어야 할 너에게'(2016-)를 다큐멘터리와 구분해서 보게 된다. '행복하십니까'는 2000년대의 인기 대중 강사 최윤희의 행복 어록과 2013년도에 확산된 안녕하십니까 자보의 발언을 조합하고, '우연히 살아남은 내가, 당연히 살아남았어야 할 너에게'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쏟아져 나온 포스트잇 메시지를 참조한 퍼포먼스 영상이다. 감정적 거리두기가 쉽지 않은 시의적이고 시사적인 화두를 인용하는 이러한 작업은 우선 사회적 관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된다. 작가는 특히 대중 강연과 같이 집단을 향해 발화되고 집단적으로 수용되는 발화 행위에 주목하며, 이런 집단성이나 집합적 정체성을 창작의 소재로 삼는다.
여기서 군중의 초상을 그려내거나 집합적 이상의 정체를 포착하려는 사회학적 관심보다 두드러지는 건 집단적 주체의 개별성을 포착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실험이다. 정아람의 작업에서는 일종의 발화 게임으로서의 수행성이 엿보인다. 사회적 발화 행위를 해체시키고 집단성 내의 개별성을 드러내는 데 어떤 장치가 도입되었는가? '행복하십니까'는 ‘행복’과 ‘안녕’이라는 단어를 빈 칸으로 표시하여 ‘우리는 행복하다’는 암시와 ‘나는 안녕하지 못하다’는 항의를 교차시킨다. 간단한 편집과 개입을 거친 텍스트는 퍼포머의 재연을 통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행복 전도사의 모순된 삶을 지시할 뿐 아니라 집단적 대중 생산의 기제로 작동하는 강연을 개인적 수행으로 전환시킨다.
'우연히 살아남은 내가, 당연히 살아남았어야 할 너에게'에 인용된 발언들은 ‘생존의 우연성’을 강조함으로써 개인의 죽음을 공동체의 비극으로 환기하고 피해자와의 연대를 표명한다. 이 작업에 등장하는 퍼포머들은 한국어 학습자 중 한국 사회에서 착취와 소외의 대상이 되고 있는 동남아시아 출신으로, ‘운이 좋아서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내용의 각기 다르면서도 반복적인 문장을 낭독한다. 여기서 작가는 일반적으로 화면에 비치지 않도록 가리는 프롬프터를 노출시키며 예외적인 효과를 연출한다. 프롬프터에 뜬 메시지와 퍼포머의 정체성을 중첩시켜 보게 하는 것이다. 이때 특정한 사건을 통해 부각된 ‘한국 사회의 여성’이라는 타자와 퍼포머 사이의 괴리감이 우선 의식되면서 발화되는 언어와의 심리적 거리두기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이런 거리감으로 인해 외국인 학습자가 문장 학습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건조한 인상을 주는 퍼포먼스 영상의 심리적 긴장감이 고조된다. 이런 거리감은 그대로 유지되어 일종의 비정함을 자아내고 말 것인가, 또는 성별주의에 따른 여성 집단이라는 모호한 주체성과 외국인이라는 또 다른 모호한 주체성이 충돌하여 약자 혐오와 차별의 문화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확신에 찬 선언과 거리를 두는 정아람의 ‘사회적 예술’은 먼저 이미지의 죽음을 의식함으로써 전통적 예술 관념과 거리를 둔다. 일단 ‘완성’되면 창작자로부터 독립할뿐더러 관람자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지고 마는 예술작품의 삶은 완전무결한 생명을 선언하지만, 실은 그러한 영원함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생체 신호를 지닌 재료-인간이 등장하는 퍼포먼스나 사회적 관념 역시 그에 관여하는 인간-창작자나 관람자가 소외되는 한 죽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퍼포먼스는 재료나 재현을 중심으로 하는 미술에 대한 고전적인 관념뿐 아니라 연출에 대한 오래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야 생기를 띌 수 있다. 정아람의 작업에서 거대 서사를 쪼개어 한 사람의 몸을 통과해보도록 하여 얻는 낯선 언어에 대한 관심은 'Staying Alive'(2010/2013)와 'Recording From My Heart'(2011)에서 스코어를 제시하거나, '더 이상 죽은 사람의 사진을 찍지 마세요'(2011)와 '청중'(2014)과 같이 관람자의 개인성을 고민해보는 작업에서도 예고된다. 새로운 게임-작업에서 언어는 어떻게 발화되고, 이는 관람자의 몸을 어떻게 통과할까. 빈틈없이 확정되어 버린 것 같은 사회적 사건과 관념을 다루는 작업이 그렇게 불확정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집단성을 관통하는 개별적 전략의 성공은 그러한 불확정성의 긴장감에 달려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