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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릭 아트 2013년 12월호 p140]

심장의 음악소리 <관계장치들-정아람>
갤러리175 10.25-11.6

문선아 기자

"제 무덤을 제가 판다." 자기 꾀에 스스로 자신을 망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속담이다. 그만큼 자기 무덤을 파는 일이 흔치 않기 때문에 생겨난 말. 그런데 진짜 문자 그대로 스스로 제 무덤을 판 작가가 등장했다. 정아람은 175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관계 장치들>에서 열심히 삽질하며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었다. 그렇다면 질문, 도대체 왜?

전시장에서는 두 가지의 작업이 있다. 네 가지의 화면과 음향으로 이루어진 "Staying Alive"와 사진으로 이루어진 "Taking 100 Beats Per One Minute", 처음 작업들을 접하면 아리송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 드럼의 비트음이 전시장을 메운 가운데, 땅을 파고 있는 여성과 맞은편에 드럼을 치고 있는 남성, 전시장을 채우고 있는 두 큰 화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대체가 알 수 없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객들은 어리둥절하다가 다만 전시장에 앉아 꽝꽝거리는 드럼의 비트에 맞춰 자신의 심장의 비트를 느껴보게 될 뿐이다.

이 조금은 어려운 작업 "Staying Alive"에서 작가는 그녀 자신의 무덤을 파는 퍼포먼스를 진행했고, 무덤을 파는 동안 자신의 심장박동을 기계장치와 연결하고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음악 악보로 실시간으로 전환시켰다. 이 악보는 드럼 연주자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이 악보를 보고 정아람이 파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 안에서 즉흥연주를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 사이에 놓인 모니터들이 다름이 아닌 심장박동을 악보로 전환시키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한편, 그 옆에 전시된 "Taking 100 Beats Per One Minute"은 심폐소생법(CPR)의 개정방식을 이용한 것. 기존의 심폐소생법은 30번의 가슴압박과 2번의 인공 호흡하는 방식이었지만, 2008년 낮은 참여율을 보완하기 위해 1분에 100회의 가슴압박을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작가는 디지털 카메라를 두어 새로운 심폐소생술의 시연 과정을 연속적으로 촬영되게 했다. 그리고 기존의 방식을 참조해서 배열하면서 비어진 두 칸을 생성했다. 따라서 이 두 칸은 사라진 두 번의 인공호흡을 암시한다.

사실상 전시장에 설명이 있지 않기 때문에, 관람객들은 도대체 이 작업들이 어떤 연관관계를 갖는지, 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리둥절하게 된다. 그러나 선량한 관람객들은 이내 자신의 관점에서 새로운 해석들을 생산해낸다. 여기서 아마도 정아람이 추구했을 두 번째 퍼포먼스가 발생한다. 첫 번째 퍼포먼스가 무덤을 파고 그것을 음악으로 해석하는 과정이라면, 관람객들이 스스로 퍼포머가 되어 예술을 해석하려는 과정은 (그들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작가가 노린 두 번째 퍼포먼스가 된다. 그래서 전시의 제목은 "관계의 장치들"인 것. 작가는 '전시'라는 큰 매개를 통해 관람객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작가가 원하는 대로 한 명의 퍼포머가 되어 그 하나의 해석으로 '작가를 추정하기 놀이'를 해볼까. 작가는 관계와 예술, 음악과 살아있음에 관심이 많은 듯 보인다. '객관화'되었다고 평가되는 비디오와 사진이라는 매체를 이용함으로써 자신은 미디어의 이면으로 최대한 사라지는 방식으로 관람객과 작업들이 전시장에서 직접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기를 희망한다. 심장소리를 악보로 기록하고 그 기록을 다시 음악이라는 예술의 형태로 변형시키는 과정은 예술이 탄생하는 전반의 과정을 은유하는데, 이는 평소의 관심사가 예술이라는 이야기. 사진작업의 제목에서의 'Beat'는 묘하게 심장의 'Beat'와, 드럼의 음악 'Beat'로 이어지며, "Staying Alive"라는 제목 역시 비지스의 음악을 환기시킨다.

무엇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삶에 대한 작가의 태도, 일면 작가는 '삶=삽질'이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그것은 아름다운 예술과도 같다고 말한다. 'Staying Alive'라는 어쩌면 지루하게 들릴 수 있는 작업의 제목은 작가의 열정적 삽질과 연동되면서 삶에 대한 적극적 태도로 변화한다. 작가의 행위에 오버랩되어 들리는 음악이 진혼곡이라기보다 살아가는 열정으로 들리는 것은, 작가가 죽음으로 다가가는 것이 종말을 의미하기 위함이 아니라 살아가는 상태를 다시 직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선취하면서 존재의 드러남을 깨달을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작가는 죽음으로 다가가며 '생의 느낌'을 극대화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전시를 통해 경험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살아있다는 심장의 음악 소리다.